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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변호사의 서랍

포퓰리즘의 시대

2016년 11월 22일


브렉시트, 트럼프, 샌더스… 바야흐로 포퓰리즘의 시대이다. 문제는 우리는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름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이데올로기 정치도 정당정치도 계급정치도 이익집단정치도 다 구경했지만, 포퓰리즘에 대해서는 정확한 규정조차도 모른다. 파시즘이 포퓰리즘인가? 아니. 사회주의가 포퓰리즘인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권위주의도 아니다.

어쩌면 포퓰리즘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같은, 또는 반세계화운동같은, 또는 지역주의와 보호주의같은, 또는 신보호주의, 신민족주의, 신중상주의같은… 신민족주의가 뿌리이고 포퓰리즘이 가지인가, 아니면 반대로 포퓰리즘이 뿌리이고 신보호주의가 가지인가?

포퓰리즘은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대중의 정치” 또는 “민중의 정치”이지만, 이것이 좌파적인 계급정치와는 다르다. 계급정치는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포퓰리즘은 “누가 우리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계급정치와 달리, 포퓰리즘은 배제의 정치 인 것이다. 트럼프가 극우가 아닌 것처럼, 샌더스도 극좌가 아닌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자. 존 주디스는 “The Populist Explosion”이라는 책에서 좌익 포퓰리즘과 우익 포퓰리즘을 구분한다. 좌익 포퓰리즘은 이 세상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우리와 그들, 대중과 엘리트. 우익 포퓰리즘은 이 세상을 세 그룹으로 나눈다. 우리와 그들과, 내지는 대중과 엘리트와 그들이 또는 엘리트가 옹호하는 집단. 이것은 인종일 수도 있고 (흑인, 유태인), 이민자일 수도 있고, 중국일 수도 있고, 여하튼 그들이 이 시스템의 일부로 끌어들인 집단인 것이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부르조아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금권정치 (plutocracy)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런 삼각 구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주 흥미롭지만, 이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존의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

생각해 보면, 미국 스타일의 정당정치에서 두 개의 정당이 민의를 반영할 때 빠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진짜 기적은 두 개의 정당이 도대체 민의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나 유럽에서나 기성정치권에서는 오로지 친이민정책만을 고수한다.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주류 정당이 있는가?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민자의 유입을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러므로, 엘리트들은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승자독식 구조를 띠는 한, 선거에서 만연하는 가장 큰 레토릭은 “당선 가능성”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네 말은 알겠는데, 일단 우리가 힘을 합쳐야 돼. 일단 우리가 권력을 쥐고 나면 (또는 좀 더 포퓰리즘 레토릭에 가깝게 말하자면, 일단 저들을 몰아내고 나면) 그때 가서 그런 문제는 이야기해도 돼잖아.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게임을 망치지 말자고!” 그들은 반대자들에게 분리주의자, 극단주의자라고 한다. 분리주의자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단계론자라고, 타협주의자라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단 두 개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 많은 대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가?

게임 이론에는 클러스터링 (clustering)이라는 게 있다. 비슷한 업종이 비슷한 곳에 다 모이는 것이다. 은행 거리, 먹자 골목, 출판 마을… 일부의 경우에는 한데 모임으로써 마치 대기업처럼 비용을 감소하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 만으로는 모든 클러스터링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정치에서도 클러스터링이 있다. 이런 클러스터링은 규모의 경제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미국 정치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어떻게 다른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므로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 노예해방의 주역 공화당은 트럼프를 낳고, 노동자와 농민의 당인 민주당은 세계화의 주역이 된다. 몇 번의 정체성 위기와 반전을 거치고 나니, 이 둘의 차이점보다는 오히려 당선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나머지와 구분하는 정당으로서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아졌다. 이 둘은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남들과) 다른 점이다. 서로서로 정책도 베끼고, 표를 낮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는 서로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고, 입장의 차이보다는 토의의 주제를 독점하는 데에서 이 둘의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정작 국민이 관심 있는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않고 (왜냐하면 당선가능성을 낮출 수 있으므로), 대선 후보들은 낙태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최저임금에 대해서 말하고, 적자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주제는 이익집단화된 정치 대결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고, 클러스터링이 쉽고, 또 (이민 근로자 문제나 이슬람 문제처럼) 당선가능성을 낮출 만큼 위험하지 않다. 최소한 미국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보다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이렇게 해도 그냥 그렇게 흘러 간다. 위기가 오면 다르다.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시기가 있지만, 이런 가정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시기가 온다. 그런 시기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미국 대선에서, 브렉시트에서 드러난 것처럼 기존 질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더 이상 공산주의도 아니고, 권위주의도 아니고,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기존의 정치담론의 구조가 새로운 문제의 제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신호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딴 것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국에도 1년 일찍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앞의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 “징악”이 뭔지는 조금씩 알아가고 합의해 가지만, 정작 중요한 “권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이 아시아의 안보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 동아시아의 안보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려하는 지금 도대체 우리는 어떤 구조를 구상하고 추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건 단순히 안보의 문제가 아니고, 경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복지 문제,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적어도 이제는 악을 몰아내는 것 못지 않게 “포스트”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이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가?”라는 질문의 프레임은 정치인들의 레토릭이다. 이 질문은 당선가능성에 관심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다른 더 중요한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당선가능성의 프레임의 심각한 문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말도 못꺼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시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폭력이다. 누가 초를 들건, 횃불을 들건, 화염병을 들건 그런 폭력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폭력은 바로 당선 가능성의 레토릭으로 다른 사람이 말도 못꺼내게 하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지금 시점에서 소위 잠룡들이 법하기 쉬운 오류이다.

그 결과는 포퓰리즘이다. 유럽도 미국도 다 하는데, 한국이라고해서 안될 것 같은가? 어쩌면, 가장 질서정연하고, 깔끔하고, 깨끗하고, 평화적인 포퓰리즘을 보여줄지 어떻게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