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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변호사의 서랍

모래위에 쌓은 집

2016년 11월 10일


“나는 그냥 권선징악을 보고 싶을 뿐이야.” 아내가 말했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렇게 증오하고, 경멸하고, 미워하면서 왜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징악은 아마도 가능하겠지만, 권선은 없어.” 내가 말했다.

“아니, 나는 권선징악을 원해.” 아내가 고집을 부렸다. “도대체 권선징악이 안될거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야?”

“일단 이건 디즈니보다는 셰익스피어에 더 가까워.” 내가 말했다.

“도대체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야?” 아내가 물었다.

“첫째, 권선징악은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들이 만든 허구야.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아.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야. 그렇지만, 그리스식의 비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맥베스식의 비극이지. 뭔가 영웅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고상하게 자폭하는게 아니고, 결함 때문에 망하는 거라는거야.”

비밀을 말하자면, 위키피디어만 둘러 봐도, 마이클 돕스에 대해서 조금만 알아 봐도 이게 해피엔딩이 아닐 거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조금만 읽어 보면, 마이클 돕스가 셰익스피어에 심취했었다는 것을, 또 이 드라마가 “21세기의 맥베스”라고 불리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왜 이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냐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뛰어 넘는 드라마를 원했다. 지난 2주간 좀비처럼 살았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종편이 하면 뉴스를 해도 이렇게 하는구나. 하루만 건너뛰어도 도저히 줄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다. 과거, 아내가 틀어 놓은 한국의 막장드라마를 곁눈질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첫째, 회사의 회장, 사장, 경영진은 일은 안하고 그냥 연애만 하냐? 둘째, 누구에게나 출생의 비밀은 있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결국 출생의 비밀이다. 게다가, A는 B와 결혼했다가 이혼하면 C와 사귀다가 다시 B로 돌아가고, 아니, 세상에 그렇게 사람이 없나? 지난 2주간의 시간은 드라마는 도저히 현실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드라마는 아무리 막장이어도 그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동굴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뼈아픈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현실을 뛰어넘는 드라마가 절실했다. 우리의 상상력은 너무나도 빈약하여, 도저히 현실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뼈아픈 각성, 속쓰린 자각의 시간이었다.

법과 정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뜬금 없이 우리는 종교를 만나게 된다. 무능과 악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법은 과거형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판단의 문제이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악보다는 무조건 무능을 선택해야 한다. 살인과 과실치사의 차이이다.

정치는 미래형이다. 역설적이게도 미래형으로 프레임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나 무능보다는 악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쁜 지도자보다 더 나쁜 것은 무능한 지도자이다. 언제라도.

드라마는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도대체 어떤 결론이 날 것인가? 지금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얽힌 상황에서 과연 무능의 프레임으로 끌려갈 것인가, 악의 프레임으로 끌려갈 것인가? 죄를 지은 자는 무능의 프레임을 선택할 것이고, 앞으로 기회를 보는 정치인은 악의 프레임을 선택할 것이다. 선택은 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결론을 수긍할 것인가? 지금처럼 과거와 미래가 뒤얽힌 상황에서? 권선징악은 가능한가? 징악은? 권선은?

아내가 모래로 지은 집, 직역하자면 “종이로 만든 집 (House of Cards)”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즈음,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집어 들었다. TV 뉴스가 드라마화되는 시기였다. 별로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다만, 악의 문제는 정치에서 언제나 절박한 문제라는 생각, 결국 이것은 종교의 문제이고, 우리의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만 머리 속에서 맴돈다.

망할 도스토예프스키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질 않고, 문득 이전에 읽었던 본회퍼의 글이 머리 속에 맴돈다. 좀 길지만 인용하자면:

어리석음은 악보다 더 위험한 선의 적이다. 악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 악은 가면을 벗길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힘으로 저지할 수도 있다. 악은 언제나 자기파괴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에 대해서 우리는 방어할 방법이 없다. 저항으로도 힘으로도 건드릴 수도 없고, 논쟁도 소용이 없다. 개인의 편견에 반대되는 사실은 가볍게 불신할 뿐인 것이다. 사실상 바보는 비판을 통하여 이를 반박할 수도 있고, 도저히 부인할 수 없으면 사소한 예외라고 제쳐둘 수도 있다. 따라서 악당과 달리 바보는 온전하게 자기만족적이다. 사실상 바보는 아주 쉽게 위험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바보가 공격적으로 되게 하기 위해서 크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보는 악당보다 더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다시는 이성으로 바보를 설득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는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리석음을 적절히 다루려면 우리는 그 본성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어리석음은 지적 결함이라기보다는 도덕적 결함이라는 점이다. 정신적으로 기민하면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또 정신적으로는 느리지만 어리석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우리는 특별한 상황의 결과로 이것을 발견하면 놀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음이 타고난 결함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바보가 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바보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에서 획득하게 되는 본성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결함은 비사회적이거나 고독한 사람들에게서보다는 사교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개인들 내지는 집단에서 더 자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이란 심리적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인 것으로 보이며, 또 이것은 역사적 상황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특별한 형태이고, 특정한 외부적 요인의 심리적인 부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살펴 본다면,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권력의 폭력적인 행사는 모두 많은 수의 인간에게서 어리석음의 폭발적 발전을 낳는다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실제로도 심리적이고 사회학적인 법칙인 것으로, 즉 일부 사람들의 권력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필요하다는 법칙으로 보인다. 이 말은 특정한 인간의 능력, 예를 들어 지적인 역량이 충격을 받거나 파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갑작스러운 폭발의 결과로 사람들은 독립적인 판단력을 빼앗기게 되며, 나아가 - 다소 무의식적으로 - 새로운 사태의 전개를 스스로 평가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된다는 전체적인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바보들은 종종 고집이 세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독립적이라고 오해하면 안된다. 사실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사람 자신과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슬로건과 구호와 이와 비슷한 것들이 그를 사로잡고 있으며, 실제로는 이런 것들과 토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고, 그는 눈이 멀었으며, 그의 본성이 잘못 사용되고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동적인 도구가 된 바보는 어떤 악행도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이것이 악이라는 점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악마적인 사람의 악용이 인간 존재에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끼치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면, 어리석음은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해방의 행위를 통하여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분명해진다. 따라서, 아주 많은 경우에 내적인 해방이 외적인 해방 이전에 이루어져야하며, 내적 해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바보를 설득하려는 어떤 시도도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는 것이 쓸모가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런 질문이 책임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질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이러한 특별한 상황에서만 그렇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 (시편 3편 10절)이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살겠다는 사람의 내적 해방이야말로 어리석음에 대한 진정한 치료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한 생각에도 위안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지혜와 독립적인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이룩하려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취하려 하는지 하는 점이다.1

원문은 다음과 같다.

Folly is a more dangerous enemy to the good than evil. One can protest against evil; it can be unmasked and, if need be, prevented by force. Evil always carries the seeds of its own destruction, as it makes people, at the least, uncomfortable. Against folly we have no defence. Neither protests nor force can touch it; reasoning is no use; facts that contradict personal prejudices can simply be disbelieved - indeed, the fool can counter by criticizing them, and if they are undeniable, they can just be pushed aside as trivial exceptions. So the fool, as distinct from the scoundrel, is completely self-satisfied; in fact, he can easily become dangerous, as it does not take much to make him aggressive. A fool must therefore be treated more cautiously than a scoundrel; we shall never again try to convince a fool by reason, for it is both useless and dangerous.

If we are to deal adequately with folly, we must try to understand its nature. This much is certain, that it is a moral rather than an intellectual defect. There are people who are mentally agile but: foolish, and people who are mentally slow but very far from foolish - a discovery that we make to our surprise as a result of particular situations. We thus get the impression that folly is likely to be, not a congenital defect, but one that is acquired in certain circumstances where people make fools of themselves or allow others to make fools of them. We notice further that this defect is less common in the unsociable and solitary than in individuals or groups that are inclined or condemned to sociability. It seems, then, that folly is a sociological rather than a psychological problem, and that it is a special form of the operation of historical circumstances: on people, a psychological by-product of definite external factors. If we look more closely, we see that any violent display of power, whether political or religious, produces an outburst of folly in a large part of mankind; indeed, this seems actually to be a psychological and sociological law: the power of some needs the folly of the others. It is not that certain human capacities, intellectual capacities for instance, become stunted or destroyed, but rather that the upsurge of power makes such an overwhelming impression that men are deprived of their independent judgment, and - more or less unconsciously - give up trying to assess the new state of affairs for themselves. The fact that the fool is often stubborn must not mislead us into thinking that he is independent. One feels in fact, when talking to him, that one is dealing, not with the man himself, but with slogans, catchwords, and the like, which have taken hold of him. He is under a spell, he is blinded, his very nature is being misused and exploited. Having thus become a passive instrument, the fool will be capable of any evil and at the same time incapable of seeing that it is evil. Here lies the danger of a diabolical exploitation that can do irreparable damage to human beings.

But at this point it is quite clear, too, that folly can be overcome, not by instruction, but only by an act of liberation; and so we have come to terms with the fact that in the great majority of cases inward liberation must be preceded by outward liberation, and that until that has taken place, we may as well abandon all attempts to convince the fool. In this state of affairs we have to realize why it is no use our trying to find out what ‘the people’ really think, and why the question is so superfluous for the man who thinks and acts responsibly - but always given these particular circumstances. The Bible’s words that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 (Ps.III.10) tell us that a person’s inward liberation to live a responsible life before God is the only real cure for folly.

But there is some consolation in these thoughts on folly: they in no way justify us in thinking that most people are fools in all circumstances. What will really matter is whether those in power expect more from people’s folly than from their wisdom and independence of mind.

  1. 위 글은 본회퍼의 옥중서한을 (내가) 옮긴 것이다. 원본은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edited by Eberhard Bethge) 을 참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