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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변호사의 서랍

[변호사 사용설명서 #3] 좋은 변호사는 고객과 싸운다

2016년 10월 26일


돈 받고 살인자가 도망갈 수 있게 도와 주려면 변호사 자격을 따야 돼. - 렉스 스타우트1

요즘 변호사도 살기 힘들다고 난리이다 (뉴스기사 1, 뉴스기사 2). 이 주제도 할 말이 많은 주제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 보자. 공급이 많아져서 가격이 하락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관련된 것은, 공급하는 모든 것이 서로 비슷한,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나지 않는 상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모든 변호사는 똑같은가?

변호사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지식의 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어차피 책에 있는 이야기 아는 사람이 변호사라면, 변호사가 서로 다를 이유가 없다. 아니다. 우리는 변호사가 어떤 것을 “알기 때문에,” 즉 법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특정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변호사는 고객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컨설턴트와 다른 점은 변호사는 고객의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모든 변호사가 같을 수는 없다. 문제 해결에 대한 이해 나아가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 변호사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다른가? 토마스 섀퍼(Thomas L. Shaffer)와 로버트 코크란 (Robert F. Cochran, Jr.)는 변호사를 네 부류로 구분한다: 대부 (godfather), 용병 (hired gun), 구루 (guru), 친구 (friend).2

대부 스타일 변호사는 (고객 이외의)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문제를 자기 마음 속에만 간직하며, 자기가 생각하기에 고객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한다. 용병형은 고객이 하고싶어하는 것을 그게 무엇이든 들어 준다. 구루는 (고객 외에)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변호사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의사결정을 통제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접근법, 우리가 선호하는 변호사상은 친구로서의 변호사인데, 그는 고객에게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고객과 도덕적인 대화를 나누며, 고객과 함께 도덕적인 결론에 이르고자 노력한다. 고객이 변호사가 보기에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믿는 것을 해 달라고 강변할 때에만, 즉 도덕적인 대화가 실패할 때에만 친구로서의 변호사는 자기 양심을 따르라고 설득한다.3

무슨 말인지 느낌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섀퍼와 코크란은 변호사를 두 가지 기준으로, 즉 네 부류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누구의 이익을 위하는가? 고객의 이익만을 위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 제삼자, 공공의 이익을 동시에 고려하는가? 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대부와 용병 스타일이다 (대체로 폭력적이다).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 좀 더 도덕적인 부류에는 구루와 친구형 변호사가 속한다. 세분하여, 자기 고집대로 하려 하는지 아니면 고객이 시키는대로 하는지에 따라서 추가로 더 나눌 수 있다. 오로지 고객의 이익만을 위하면서, 자기 고집대로 하는 부류는 대부이고, 고객의 의견을 절대로 존중하는 부류는 용병이다.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하지 않는가? 고객의 이익 이외에도 제삼자와 세상과 공중도덕을 염두에 두는 구루와 친구 역시도 자기 고집대로 하는 부류는 구루이고, 심각한 도덕적, 철학적 상담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을 굽히지 않으면 고객이 하자고 하는 변호사는 친구이다. 표로 만들어 보자면,4

  변호사 뜻대로 고객 뜻대로
고객의 이익만 위하여 대부 용병
타인의 이익을 배려 구루 친구

흥미로운 관찰은 지급까지 나에게 와서 다른 변호사에 대해 비판하는 이야기도 대체로 위 표의 세로축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 부류는 말한다.

그 변호사는 말이야, 도대체 싸가지가 없어. 내가 뭐라 하건, 완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단 말이야.

두번째 부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 변호사는 도대체 하는게 없어. 내가 말하면 그냥 그대로 말하고, 내가 하자고 하면 그냥 그대로 하고… 도대체 그 비싼 돈 받고 뭐하는 짓인지 몰라. 차라리 내가 직접 하고 말겠다.

그냥 둘이 서로 변호사를 바꾸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두 부류가 변호사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경험상 변호사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 놓는 많은 경우에 겉으로 보기에는 변호사의 능력이나 역량, 시간 배분에 대한 문제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금만 더 깊게 파헤쳐 보면 사실상 변호사가 하는 역할과 기대에 대한 차이 때문이다. 내가 하는 결정에 일일이 간섭하는게 싫은가? 그렇지만, 또 매일 바쁘다는 핑계만 대지 말고 가능한 한 나와 많이 시간을 보내는 변호사였으면 좋겠는가? 어쩌라구. 같이 만나서 윷놀이나 할까?

더 흥미로운 점을 이야기해 보자. 이게 이 이야기가 재미있어 지는 지점이다. 그러면 세로축에 따라서 변호사에 대해서 평가하거나 내지는 비난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예를 들자면 이런 비판이 될 것이다.

그 변호사는 도대체 양심이 없는 것 같아. 아 글쎄, 해외근무중에 심각하게 다친 직원을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보았는데,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더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내지는 반대 입장에서,

그 변호사는 도대체 자기가 뭘 하는 놈인지 모르는 것 같아. 아 글쎄, 해외근무중에 심각하게 다친 직원을 해고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 보았는데, 양심이 있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장황하게 설교를 늘어 놓더라고. 내가 그딴 설교 듣자고 자기한테 돈내고 법률자문 받는 줄 아나봐.

이런 부류의 불평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약간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비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만약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아주 흥미로왔을 것이다. 왜 이런 비난은 하지 않을까? 첫째는 어떤 변호사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에 대해서, 즉 전술에 대해서는 변호사가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한다. 그런데, 전략에 대해서 내지는 동기, 목표에 대해서 문제제기하는 변호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실제로도, 만약 동기나 목표가 자신의 양심에 맞지 않는다면, 변호사는 그 사건을 수임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로, 어떤 고객도 그런 변호사와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문료 받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도덕적인 전제와 동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이것은 십중팔구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런다고 해서 설득당할 고객도 없다. 그리고, 변호사가 수임을 거절할 수 있는 것처럼, 고객도 그 변호사를 해고할 수 있다. 그리고, 셋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고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변호사도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과연 옳은가?

나는 당연히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정황에 미루어 보아, 위 섀퍼, 코크란의 구분은 과연 옳은가? 도대체 이 세상에 구루, 친구형 변호사가 있기는 한가? 수임료는 고객에게 받고, 상대방 처지 생각해 주고, 공중도덕과 양심에 호소하는 변호사는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 변호사가 누구인가? 싸워서 이기는 사람 아닌가?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싸워서 이기는 것은 하수이고, 고수는 설득해서 이긴다.

위 두 사람의 논문의 구분법이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은 (“현실에 그런 변호사 없어”) 그가 이 문제를 도덕의 프레임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당연히 이것을 “목표 달성이 현실적인가? 또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로 접근하겠다. 해외근무중에 중상을 입은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현실적인 목표인가? 또,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바람직한가? 회사 입장에서는 회사 이미지나 다른 동료직원의 사기 등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소탐대실하는 것은 아닌가? 위의 표를 다시 만들어 보자.

  변호사 뜻대로 고객 뜻대로
고객이 설정한 목표달성 대부 용병
변호사가 생각하는 목표달성 구루 친구

나는 특별히 도덕적이지는 않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같이 모호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즉, 그렇다고 해서 도덕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주 흥미로운 인간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표에 따르면, 대부분의 변호사는 고객이 설정한 목표를 고객이 원하는 방법으로 달성하도록 도와 주는 “용병”에 속할 것이다. 특히 거래전문, 기업자문 변호사는 대개 이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소수의 부류가 “대부”에 속할 것이다. 특히 송무 관련 변호사들이 여기 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법원의 절차법에 대한 사항은 그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랫줄에 속하는 변호사, 즉 구루나 친구는 희귀종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변호사 수가 많아지고 수임에 대한 압박이 높아질수록 이 부류에 속하는 변호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친구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갚지 않는다! 작은 돈도 아닌데. 여기서 끝나면 좋겠지만, 인생은 원래 복잡한 법이다. 그런데, (1) 친구가 돈을 빌렸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증거도 증인도 없다. 아니면, (2) 그 친구 파산했다. 완전 빈털터리이다. 아니면, (3) 그 친구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행방불명이다. 첫번째의 경우에는 이기기 힘들다. 두번째의 경우에는 이길 수는 있는데, 돈 받기는 힘들다. 세번째는 이길 수도 있고, 돈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가 없다. 위의 도덕 문제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또 내가 위에서 가능성 보다는 현실성 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 변호사를 찾아 갔다면, 변호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변호사별로 반응이 다 다를 것이다. 불가능한 경우, 가능하기는 하지만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진짜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경우, 가능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경우, 이런 경우에 당신은 변호사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가? 변호사 입장에서야 당연히 수임료만 낸다면야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입장 차이는 없다. 따지고 보면, 위의 도덕의 문제는 그러니까 변호사의 양심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레이밍이 중요한 이유는 (고객의) 도덕의 문제로 봤을 때와 (변호사의) 양심의 문제로 봤을 때 선호하는 변호사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위 두 저자와는 달리 친구로서의 변호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결국 따지고 보면 고객의 의사결정 과정에 변호사가 얼마나 많이 개입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또 얼마나 공을 들여 고객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내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좋은 변호사가 줄어든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다. 이 시리즈에서는 계속하여 내 경험에 비추어 좋은 변호사를 찾는 방법을 정리해 보겠다.

좋은 변호사를 찾는 방법: 첫번째 팁

뛰어난 소송전문 변호사가 있었다. 어느날 그에게 물었다. 돈도 많이 벌고 좋겠네요?

그가 말했다. “아니, 인생이 갈수록 어려워져. 어려운 사건을 몇 건 이기고 나면, 점점 더 어려운 사건만 오지. 이렇게 생각하면 돼. 쉽고 누구나 이길 수 있는 사건이라면, 승률 높고 까다로운 변호사에게 오겠어? 아무나 할 수 있는 사건이라면 싸고 시간 많은 변호사에게 가지. 그러니까, 나에게는 갈수록 어려운 사건만 오는거야. 그러니 계속 이기기는 좀 더 힘들어지고…”

그렇다면, 승률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능력 없고 싼 변호사에게는 쉬운 사건만 갈 것이니 그의 승률은 올라갈 것이고, 능력 있고 비싼 변호사에게는 어려운 사건만 갈 것이니 그의 승률은 내려갈 것이다. 오해하진 말라. 변호사를 선택할 때 승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고싶은 말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를 가고싶은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가? 그저 원하는 것은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것 뿐인가? 그게 어디인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고? 그렇다면, 위의 표의 아래쪽 구루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라. 그게 어디인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갈지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대부나 용병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라. 좀 더 문제를 단순화해 보면, 변호사는 실제로 싸움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이다. 판사 앞에서 또는 상대방과 만나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여러분이 원하는 변호사는 그냥 그렇게 싸움에만 집중하길 원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싸움 이외에도 여러분과 좀 더 시간을 많이 보냈으면 좋겠는가?

When Breath Becomes Air의 저자 폴 칼라니티(Paul Kalanithi)는 의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뛰어난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레지던트였을 때 나의 가장 숭고한, 이상적인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모두 다 죽는다. 오히려, 내 목표는 환자 또는 환자의 가족이 죽음 또는 질병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순간이 오면, 나는 많이 그랬지만, 죽음의 적이 아니라 죽음의 대사가 된다.5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일종의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이 체크리스트의 첫번째는 바로 이 점이다. 내가 원하는 변호사는 용병인가, 대부인가, 친구인가, 아니면 구루인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변호사와 함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선 변호사와 그 목표를 재점검하는 것인가?

각주

영어 원문, 인용, 기타 편의상 읽기 흐름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는 내용을 맨 뒤로 빼 두었다. 한국 변호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국 변호사 이야기입니다.

  1. 원문은 “If you want to take dough from a murderer-for helping him beat the rap you must be admitted to the bar - Rex Stout” Have Briefcase Will Travel: An Essay on the Lawyer as Hired Gun, by Joseph Allegretti (pdf) 에서 인용 ↩︎

  2. 상세한 점은 “Technical” Defenses: Ethics, Morals, and the Lawyer as Friend (pdf)을 참고하라. ↩︎

  3. 위 글에서 인용.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godfather lawyer ignores the interests of other people, keeps the issue to himself, and does what he thinks will benefit the client. The hired gun defers to whatever the client wants to do. The guru considers the interests of other people, and controls the decision by aggressively persuading the client to do what the lawyer believes to be the right thing. The approach we recommend, the practice of our preferred lawyer, the lawyer as friend, raises the moral issue with the client, engages the client in moral conversation, and seeks to arrive at moral decisions with the client. Only when the client insists on doing something the lawyer believes to be wrong-only, that is, when moral conversation fails-would the lawyer-as-friend insist on following his own conscience.” ↩︎

  4. 이 표는 The Lawyer as Limo: A Brief History of the Hired Gun, by Michael I. Krauss (pdf)에 있는 표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

  5. 원문은 다음과 같다. “Technical excellence was not enough. As a resident, my highest ideal was not saving lives–everybody dies eventually–but guiding a patient or family to an understanding of death or illness… In these moments, I acted not, as I most often did, as death’s enemy, but as its ambassad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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